그러니까 그건 토요일 오후 2시 27분이였다.
나른한 주말오후 특별히 할일이 없어 쇼파에 앉아 하품만 하던 그녀가, 문득 창고를 정리해야 겠다고 마음먹은 시간말이다. 머리를 질끈 묶고 손목을 걷어붙였다. 창고로 쓰고 있던 벽장을 힘껏 열었다. 순간 코에 느껴지는 과거의 냄새. 조금은 퀴퀴한듯, 그렇지만 그렇게 나쁘지않은 나무 벽장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 때 단단히 마음먹고 샀던 영어교재도, 언젠가부터 안 입던 겨울 외투도, 대학교때 즐겨입었던 이제는 유행이 지나버린 치마도. 꺼낼때마다 조금씩 더 오래된 것들이 나왔다. 물건 하나하나를 꺼내면서 옛날을 생각했고, 떠오르는 추억을 느낄때마다 피식하고 웃었다. 꽤나 재밌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하나하나씩 밖으로 내놓았다. 그렇게 파해쳐가다 마지막에 발견한 것은, 창고 가장 깊은 한 구석에 있던 조그만 노란색 상자.
상자를 처음 보았을 때 순간 몸이 멈추었다. 오랜시간이 지났지만 보자마자 기억이 났다. 아니 사실 잊은 적이 없었던지도 몰랐다. 그냥 그렇게 잊은척하고 모른척하고 지내왔던 시간인지도 모른다. 애잔한 마음으로 연 상자. 그리고 그 속에 가득한 그의 편지들. 그가 주었던 쪽지들. 그가 준 선물에 붙여있던 작은 카드들도... 몇개를 읽어보았다. 눈을 한번 꼭 감았다가 다시떴다. 순식간에 붉어진 눈을 훔치고, 상자를 가슴에 꼭 껴안은 채 거실로 나왔다.
시간은 오후 세시. 계절은 겨울이라 날씨는 차지만,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만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큰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맞으며 소파에 기대 앉았다. 하얀손으로 편지를 열었다. 는에 가득한 그의 익숙한 글씨.. 생각해보면 그는 남자치고는 꽤나 글씨를 잘 쓰는 편이었다. 그땐 그의 글씨에 지지 않으려고, 이쁜 글씨로 담장쓰려고 꽤나 고생했었는데.. 그 시절 낑낑대며 글을 눌러적던 자신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이런 저런 상념과 함께 읽어내려가는 편지들. 그는 참 많이도 편지를 썼었구나. 생각해보면 먼저 편지를 보내는 쪽은 늘 그였다. 같이 있을때도 늘 그렇게 많이 이야기 하면서, 그래도 늘 편지엔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 담겨있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가슴벅차했던 적도 있었고, 눈물 흘렸던 적도 있었다. 너무 좋아서 잠옷바람으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몇번이라 다시 읽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읽어가다 어느 파란 편지지에 발견한 우리들 사이의 균열의 시작. 그리고 남은 편지에서 마저 찾아낸 오해들, 미움들, 원망들. 마음이 아려왔다. 편지상자라는 건 너무 슬프다. 내가 어떻게, 어떤 답장을 보냈었는지, 내겐 남아있지 않다. 혹시나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러버렸는지 나는 이제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거듭된 그의 편지를 보며 그 마음을 그려볼 뿐이다. 그나마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그때 얼마나 어렸었던가에
대한것 뿐.
편지에서 보이는 그의 당부들, 그의 부탁들, 그의 요청들.
편지속, 한글자 한글자에서 읽어지는 그의 수줍음들. 간절함들 그리고 눈물들. 그가 나를 얼마나 아꼈었는지,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었었는지를, 그리고 그가 그러다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를.. 어째서 그때는 몰랐을까? 어째서 이렇게나 컸었던 마음을 그때는 몰랐을까? 왜 그는 좀더 쉽게 설명해주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랬다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세월이 깊어질수록 변해가는 것은 술같은 것만이 아니다. 편지속에 담긴 마음은 몇 년을 이안에서 고이 묻히어 오랜시간 나이들어 왔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그때는 결코 몰랐었던 것들에 대해서.. 그와의 이별뒤로 만났던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았던 상처와 실망이 보태져서, 그뒤로 홀로 살아가면서 얻은 몇가지 삶의 진리들을 가지고서야, 벌써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그때 그가 얼마나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깨닫는다. 그게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 것이었는가를, 그가 나를 얼마나 배려했었는지를, 그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바보같이 그것을 몰랐었는지를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때 담담하게 말하던 그 목소리뒤에 어떤 마음이 숨겨져 있었는지도..
그때 우리가 너무 어렸었어. 너조차도 몰랐던 너의 마음. 나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의 마음.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그 지나간 마음들을 지켜보는 것은, 죽을만큼 괴로웠던 그 이별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 이별만큼이나 가슴아프다. 시간이 지나 너의 마음을 알았지만, 너의 고마움을 깨달았지만 이제는 전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더이상 나란히 서서 걷는것 조차 할 수 없는 사이니까.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어리숙한 둘이었기에 사랑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해봐. 그냥 그렇게 순진하고 미숙한 우리였었기에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봐. 우리 둘은 이제는 함께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우린 분명히 많은 시간을 함께 했었고. 너와 함께한 시간이 있기 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니까. 당신을 만나서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느꼈으니까, 만났다는 그것만은 정말로 고마우니까. 내안에 그만큼 니가 들어와서 나를 바꾸어놓은거니까, 그 바꾸어놓은 만큼 니가 계속 살고 있는거니까. 그러니까 영원히 바이바이는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그런 생각을 하면 이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을 용기도 조금나. 아직도 엉엉 소리내어 우는 나를 다독거릴 수 있을거 같아.
토요일 오후. 해는 기울어가고 아파트 커다란 창너머로 붉은 하늘이 스며든다. 소파에 기대앉은 그녀와 흩어진 편지들을 옆에 두고 조용한 토요일은 저물어간다.
퇴고는 훗날의 일. 다만 심장이 아프지 않기를 기도하면서